단종국장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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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야기
탄생과 성장
왕세자 책봉
즉위
계유정난
단종의 선위
노산군 강등과 영월유배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정축지변]
단종 승하
잊혀졌던 묘를 다시 찾다
단종 복위
장릉 조성
태백산 천신 “소원을 들어주는 단종”
단종의 꿈과 부활

■ 탄생과 성장

단종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1441년(세종23) 7월 23일 동궁 자선당에서 태어나셨다.

세종은 단종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여, 즉시 근정전에 나아가서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 반란이나 살인 등의 죄 등을 제외한 죄수들을 방면하고 온 나라에 원손의 탄생을 알렸다.

■ 왕세자 책봉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나랏일에 여념이 없던 까닭에 눈과 다리가 많이 아파 고생하던 세종은 1445년 5월 큰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은 세자인 문종이 대신 다스리게 하였고, 단종의 나이 8살이 되던 1448년 왕세손에 봉하였다.
세종은 일찍이 끔찍이도 아끼던 어린 원손을 안고 궁궐을 다니다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을 보면 “과인의 죽은 후에도 경들이 이 아이를 보호하라”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 즉위

1452년 5월 12살의 어린 왕세자인 단종은 경복궁 근정문에서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문종의 유언에 따라 나랏일을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맡게 되고 집현전 학자들이 이를 도왔다. 동생 수양대군이 왕권 탈취에 야욕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문종은 어린 왕세자의 보호를 위해 의정부에 절대 권한을 위임하였다.

■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로 하여금 한양성문을 지키게 하고는 직접 군사 외교 등 국사의 전권을 담당하고 있던 우의정 김종서 집으로 찾아가 문밖으로 유인한 뒤 무사를 시켜 철퇴로 내리쳐 죽였다. 그리고 임금의 거처에 이르러 어린 왕을 위협해 의정부와 조정의 대신들을 궁궐로 차례로 불러들이고 단종 보호 세력을 철퇴로 쳐 죽였다. 또한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이는 등 단종측근 세력들을 살해하거나 귀양 보냈다.

■ 단종의 선위

모든 정권을 차지하게 된 수양대군은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경연을 중지하여 단종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또한, 단종의 마지막 남은 보호세력인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많은 친인척들이 수양대군에 의해 죄에 얽혀 죽거나 유배 보내져 단종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결국 재위 3년 2개월 만인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과 한명회 권람 등 그 측근들에 의해 둘러싸여 회유와 협박에 의해 겁에 질린 단종은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어보를 건네고는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은 근정전에서 조선 제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 노산군 강등과 영월유배

사육신 등의 상왕 복위운동으로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세조와 찬탈공신들은 명나라의 상황 복위 소식에 놀라 단종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세조는 단종을 상왕에서 끌어내려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는 첨지중추부사 어득해와 군사 50명이 호송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이때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는데, 영도교는 후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한양을 벗어난 단종은 여주, 원주, 제천을 거쳐 7일만인 28일에 영월 청령포에 이르렀으니 음력 6월말 무더위 속에 17살의 어린 단종이 겪어야 했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은 절벽으로 막혀있고 우물하나 없는 천애의 유배지였다. 이곳에는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봤고<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년 된 관음송(觀音松), 단종이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돌을 주워 쌓은 망향탑, 그리고 궁이 있는 한양을 그리워하며 머물렀다는 절벽바위 노산대와 망향탑 등 어린 단종의 애환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청룡포 생활도 2개월 만에 큰 홍수로 이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겼다.

■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정축지변]

1457년(세조3) 7월 단종이 영월로 유배 온지 두 달째 머무는 사이 경상도 순흥에 유배가 있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영월에 있는 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관노 이동이라는 자에 의해 결국 복위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금성대군은 감옥에 갇히었다.
당시 세조는 복위운동의 중심인 순흥 일대 백성들을 몰살하였는데 그 죽음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30리 안에 사람이 없었고 이때 흘린 피가 죽계계곡을 흘러 이웃한 마을에 이르러서야 끊어졌다 하여 지금도 이 마을을 사람들은 '피끝 마을'이라고 부른다.

■ 단종 승하

그해 10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계획이 발각되자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 영월로 보낸다.
단종은 왕방연에게 자신을 찾아온 까닭을 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평소 단종을 모시던 공생(貢生)이 세조로부터 큰 상을 받을 욕심에 활줄로 단종의 목을 조르니 17세의 어린 단종은 그만 승하하게 되었다.
이러한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여 시종과 시녀들은 영월 동강에 몸을 던지니 그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쳐 밤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이 억울하게 승하했으나 서슬퍼런 세조의 후환이 두려운 수령이나 백성 모두 단종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는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았던 옻칠한 관(棺)을 가져다 단종의 옥체를 모시고 엄씨 선산이 있는 영월 인근 산기슭의 장사 지낼 곳을 찾았다. 그러나 음력 10월의 한겨울이라 땅은 얼어붙고 눈마저 덮혀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산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 마침 숲에서 노루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살펴보니 노루가 앉았다간 양지바른 자리에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단종을 묻고는 가족을 이끌고 서둘러 떠났다.

■ 잊혀졌던 묘를 다시 찾다.

엄흥도가 단종의 묘를 쓰고 떠난 뒤 거의 버려지다 시피 되었던 것을 1516년(중종11) 중종은 승지 신상을 보내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단종묘를 찾아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 뒤로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았거니와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던 것을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방치된 단종의 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였는데 전해오는 얘기로는 박충헌이 어느 날 꿈에서 단종을 만나자 예를 다해 맞은 뒤 그의 억울함을 듣고는 봉분을 조성하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자 그 이후로 괴이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1581(선조14)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단종 묘로 가는 길이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해져 길가는 나그네들도 탄식하니 묘역을 수리하고 비석을 세워달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봉분에 흙을 쌓아 올리는 등 묘역을 정비하였다.

■ 단종 복위

조선후기 들어 효종·현종을 거치면서 노산군이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 아니라는 점과 사육신의 충절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높게 이뤄졌다. 1681년(숙종7) 노산대군으로 칭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단종이 억울하게 승하한지 246년 만인 1698년(숙종24) 숙종은 노산대군을 다시 왕으로 높여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는데,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 것을 ‘단(端)’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하였다.
그리고 단종과 정순왕후의 신위를 종묘 영녕전의 문종과 현덕왕후 옆에 모시는 것으로 단종 복위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 장릉 조성

단종 복위와 함께 단종의 묘소도 왕릉의 모습으로 새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왕릉 조성과 달리 석물 체제는 정종 능인 후릉(厚陵)을 따르고, 수는 덕종[의경세자] 능인 경릉(敬陵)을 따랐는데 후릉의 석물체제는 숙종과 영조가 왕릉 석물 중 가장 겸손한 예로 들어 왕실 능제에 있어 정식 관례로 따를 것을 권장했던 능이며, 경릉도 대군 묘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석물이 매우 간략하여 간소하게 조성되었다.

■ 태백산 천신 “소원을 들어주는 단종”

죽은 단종 임금의 혼령이 영월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어라연에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라연에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며 단종 임금께서는 태백산의 신령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바람에 단종대왕의 혼령은 태백산으로 떠나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충절사에 모신 추익한이 단종 임금께 드리려고 머루 · 다래를 가지고 수라리재를 넘어 영월읍내로 오다가 백마를 탄 단종 임금을 만났을 때 단종 임금께서 ‘나는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어라연 물고기 떼들이 동강 어라연 계곡에서 ‘신선이 되지 말고 태백산 신령이 되라.’는 진언을 듣고 가던 길이었다.
이러한 전설은 영월 사람들에게 민간신앙으로의 발전되었다. 단종 임금의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올라갔는데, 올라간 주변의 산신각과 성황당에는 모두가 단종 임금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있다.
이처럼 죽어서 백성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단종대왕이 된 것이다.

■ 단종의 꿈과 부활

단종문화제는 단종의 혼과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킨 영월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제이다.
1698년(숙종24) 이후 270년 동안 제향祭香만으로 그치던 것을 1967년 “단종제”로 확대 진행하였고 1990년 제24회 때부터 “단종문화제”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단종 승하 550년인 2007년부터는 조선 왕 중에 유일하게 장례를 치르지 못한 단종을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단종국장國葬” 재현 행사라는 영월만의 독특한 문화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